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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일상

[산문] 즐겁고 해로운 취미 - 나의 작은 술 역사가 혼술에 이르기까지 (featuring 이이치코 소주)

장기하의 [상관없는 거 아닌가?] 를 보고 같은 주제로 내 산문을 쓰고 있다. 이번 주제는 즐거운 '술'이다. 

 

나 또한 취중진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멍청해지고 마냥 웃게 되어서 진심은 맨정신일때 더 잘 말할 자신이 있다. 내가 술이 많이 취했을 때 한 말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그냥 바보 같은 말들이다. 술은 나에게 즐거움, 휴식이고 진지한 의미는 없다. 친구들과 만나 즐겁게 수다를 떨며 먹는 술을 좋아하고, 유난히 열심히 일한 어느 날 저녁 집에서 편하게 쉬면서 마시는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애인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먹는 술도 좋다.  

 

이렇게 술에 대해 내 스타일을 말할 수 있기까지 20년이 걸렸다. 한국에서 스무살이 되기 전에 친구들과 몰래 마시기도 했고, 대학시절에는 시험 때 말고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저녁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이민와서는 잠시 술을 마시지 않다가, 술을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며 술을 마시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친한 사람들과 퇴근 후 즐겁게 한 잔씩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술을 좋아할뿐, 어떻게 마시는게 가장 행복한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내가 선호하는 음주 스타일을 발견하게 된건 돈을 벌기 시작하고 몇년 쯤 지났을 때였다. 30대 부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나는 슬슬 술집에서 허접한 안주와 술을 마시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정하고 거기에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이 좋았다. 친구와 만나서 약속을 할 때는 커피숍에 가는 것보다 생맥주가 다양한 펍에 가거나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이자카야 바에 가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부모님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나의 술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혼술이라는 멋진 단어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나는 이미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술을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먹을 수 있다는 거.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안다.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소중하다. 내 스타일 떡볶이를 만들어 어울리는 페일에일을 곁들이며 어제 나온 리디북스 새 책을 읽을 때의 그 분위기. 날 사랑해주는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나와 상당히 비슷한 성향의 친구와 있을 때도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한잔 하는 시간들이 삶의 즐거움이라면, 일상의 혼술은 잔잔한 행복이랄까. 

 

혼술을 하면서 술이 내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재밌는 것은 나는 친구도 술도 즐거울 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울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우울할 때는 친구를 만나서 하소연하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을 하고 책을 읽거나하면서 푸는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술은 진짜 내 친구인가. 종류가 너무 많으니 부캐가 많은 친구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이가 40이 가까워지며 건강 생각도 많이 하지만 술을 끊고 싶다 라고 생각이 든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마지막으로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얘기하자면, 맥주와 와인이다. 라거부터 IPA 까지 음식에 어울리게 골라마실 수 있는 맥주는 이제 냉장고에 없으면 불안하다. 캘리포니아에 살아서 술을 더 좋아하게 된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각종 맥주 양조장들부터 와이너리까지 너무 많아서 가격이 저렴한 것도 한몫하는거 같다. 좋아하는 맥주와 와인은 셀 수도 없어서 이름을 말하는건 큰 의미가 없다. 위스키는 좋아하고 싶지만 체질에 맞지 않는다. 보드카와 데킬라는 좋다. 스시와 함께 먹는 사케도 매우 좋아한다. 맥주와 함께 하드리커도 구비해 놓는 편인데 요즘 항상 있는 술은 일본 큐슈에서 온 증류식 소주 이이치코 다. 일본인들이 하는 이자카야에서 처음 마셔보았는데.. 무엇보다도 나와 잘 맞고, 어지간한 음식과 다 잘 어울린다. 탄산수에 먹기도 하고, 그냥 차가운 물이나 얼음을 넣어 마시기도 한다. 지금도 한 잔을 옆에 두고 글을 쓴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술에 대해 글을 써보는건 처음이다. 일년 후 또 써보면 재미있을거 같다. 그때도 마시고 있으려나..